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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맏형·반미의 선봉’ 차베스는 누구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 사망

‘남미의 맏형·반미의 선봉’ 차베스는 누구

한겨레|입력2013.03.06 10:10|수정2013.03.06 13:30

 

[한겨레] 5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핍진한 현실에서도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투지와, 이를 막는 걸림돌엔 힘껏 싸워 저항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빈민과 노동자계층에 광범위한 복지혜택을 줘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이상은 중산층과 부유층의 반발에 부닥쳤고, 가난에 허덕이고 분열된 남아메리카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한데 묶어 서구 자본주의 질서에 대항하자는 구상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 격렬한 삶은 그에 대한 평가에서도 명암이 뚜렷했다.

차베스는 1954년 설탕 산업으로 유명한 베네수엘라 바리나스주의 사바네타의 가난한 교사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워낙 가난해 할머니댁에 맡겨진 차베스는 어릴적 역사와 그림, 야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17살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있는 군사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군인들이 짠 새로운 커리큘럼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와 혁명가 체 게바라의 저작에 심취한다. 한편으론, 카라카스에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을 목도하며, 그는 앞으로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학생 시절 차베스는 페루의 좌파 정치가인 후안 벨라스코가 "군인들은 부패한 체제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 연설에 감명을 받는데, 이는 그가 후일 군 쿠데타를 시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수석으로 군사학교를 졸업한 차베스는 고향 근처로 임관하는데, 이곳에서 군과 정부의 부패에 대해 깊은 실망을 느끼고 마르크시즘에 눈을 뜬다. 1977년 군대 내에 혁명운동그룹을 창립한 뒤 5년 뒤엔 이를 좀더 체계화한 볼리바르 혁명군(EBR-200)을 만들었다. 볼리바르 혁명군은 군사학교 제자들이 합류하며 규모가 커지지만, 그의 사상에 의심을 품은 군 간부들은 그를 다시 오지로 보냈고, 여기에서 차베스는 이곳의 소수민족과 교제하며 향후 원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진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89년 중도주의 성향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그는 국제금융기구(IMF)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을 펼치고 사회복지예산을 삭감했고,이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에 차베스는 볼리바르 혁명군을 기반으로 대통령, 국방부, 군공항 공격을 목표로 삼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는 해외 순방길에서 돌아오는 페레스 대통령을 억류하는 데 실패해 몇년간 준비해온 쿠데타도 물거품이 돼 버렸다. 항복한 차베스는 시몬 볼리바르를 언급하며 "지금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때다. 새로운 기회들이 생겨날 것이고 이 나라는 명백히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뒤 감옥에 갇혔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단지 지금 실패한 것이다"라는 차베스의 말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1년 뒤 페레즈 대통령이 탄핵 되면서 차베스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사이 베네수엘라의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정부의 부정부패, 경제정책 실패, 해외 자본에 의한 부의 독점 등으로, 국민 1인당 평균 소득은 1990년 5192달러에서 1997년 2858달러까지 떨어졌고,1990년대의 범죄율은 10년 전에 비해 2배 늘었다. 쿠데타에서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방향을 돌린 그는 1997년 정당 '제5공화국운동(MVR)'을 만들고 이듬해 대선에 출마했다. 기존의 정치를 뒤엎고 새 판을 짜자며 광범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그의 정열적인 모습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중산층 궤도에서 탈락한 이들과 빈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56.2%의 득표율로 승리한다. 그는 시몬 볼리바르의 이상을 정치이상으로 내놓았다. 라틴 아메리카의 통합, 교육과 복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19세기 볼리바르의 이념을 계승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수락 연설에서 "베네수엘라의 부활은 이제 시작됐다. 어느 것도, 아무것도, 이를 멈출 수 없다"고 외쳤다.

1999년 2월 취임한 차베스는 자신의 월급 1200달러를 모두 장학금으로 내놓고 정부 소유의 전용기들을 파는 등 파격적인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간다. 그의 초기 재정 정책은 룰라 브라질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의 온건한 쪽이었다. 자본주의체제의 틀 안에서 해외투자를 권장하고 국제금융기구의 권고안 대로 재정정책을 펴나갔다. 하지만 사회복지 분야에선 파격적이었다. 그는 1억1300만달러를 들여 식료품 값을 낮추고 무상 의료, 무료 접종, 문맹 퇴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국민들과의 대외접촉을 늘리기 위해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 매주 자신이 출연하는 코너를 만들어 시민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슈를 토론하고 춤추고 노래했다.

그는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위해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1999년 주민투표·총선에 의해 새로 구성된 국회는 차베스 진영이 의석 95%를 차지했고, 국회는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보호, 주거·의료권, 환경보호, 정부 투명성, 대통령 3선 이상 금지 등을 담은 헌법을 마련해 통과시켰다.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국가이자 4위의 석유 수출국인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는 경제의 주춧돌이자 견인차였다. 그는 외국 자본이 소유한 석유 회사를 국유화하는 조처를 시행해 채굴·정유산업의 50% 이상을 국영회사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2000년 무렵부터 그에 대한 비판도 자라났다. 과감한 개혁을 밀어붙이는 차베스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02년 4월 시민들은 차베스 찬반으로 갈려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차베스의 명령에 따라 발포한 총에 20명이 사망하는 등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사회 혼란을 틈타 군대 내의 반 차베스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처음에 성공하는 듯 보였던 쿠데타는 다시 차베스 지지 시위가 불붙으면서 사흘 만에 무위로 끝났다.

2005년 그는 볼리바르 혁명에 이어 다시 '21세기식 사회주의'를 새로운 이념으로 내세우고, 평등·정의·연대를 호소했다. 그는 중국·소련의 사회주의는 차명민주주의가 부족하고 전제주의가 짙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21세기식 사회주의와 차별화시켰다.

차베스는 미국처럼 '하나의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을 염원했던 볼리바르의 이상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인 '석유 외교'를 펼쳤다. 남미 국가들에게 석유를 값싸게 공급하는 대신, 의료·식량 등을 맞교환 하는 방식이다. 차베스는 2000년 깊은 친분이 있는 피델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는 파격적으로 싼 가격에 매일 5만3000배럴의 석유를 공급하는 한편, 쿠바는 숙련된 의료진과 교사 2만명을 파견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남미국가들과 함께 뭉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2004년 미주볼리비아동맹(ALBA)의 창립국이 된다. 2000년대 중반, 라파엘 코레아(에콰도르), 오르테가(니카라과) 등 사회주의 색채를 띤 지도자들이 집권했는데, 당시 이는 '분홍 물결'(핑크 타이드)라고 불렸고, 차베스는 기꺼이 이 분홍물결에 동참했다.

 미국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2001년 말 미국이 9·11 사건 이후 알카에다 공격을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하자 그는 "또다른 테러로는 테러를 이길 수 없다"며 미국을 맹비난했다. 그는 미국이 싫어하는 이란, 리비아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사회주의적 요소를 국가정책에 도입한 시리아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놓고도 '휴머니스트이자 친구'이라고 불렀다.

2011년 6월 암 투병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고 여러차례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은 차베스는 2012년 7월 '완전히 암을 극복했다'며 4선 출마 의지를 밝히고 같은해 10월 마흔살의 젊은 야당 후보 엔리케 카플릴레스와 맞붙어 승리한다. 하지만 쇠약해진 그의 몸은 암과의 사투를 이겨낼 수 없었다. 2012년 12월 쿠바로 네번째 수술을 받으러 간 차베스는 수술 뒤 호흡기 감염 합병증에 시달리는 등 회복하지 못하고 이국 쿠바에서 눈을 감았다.

차베스의 경제, 사회, 인권 정책 등에선 논란이 많다. 차베스는 빈곤의 퇴치를 내걸고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받으며 빈민들에게 과감한 혜택을 주는 사회복지정책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7.8%(2011년 기준)에 이른다. 1999년 새로 탄생한 헌법은 성·인종에 대한 평등 등 인권에 관해 획기적인 진보를 이뤘다고 평가받지만, 2010년 국제사면기구(AMNESTY)는 차베스 행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데 대해 비판했다. 2008년 <휴먼 라이츠 워치>는 차베스 정부가 언론,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고,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는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유주현 기자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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