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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Esse#2/S# peom

그리스인 조르바 P.154

잠에 못 이겨 눈을 붙였다가 깨어 보니 조르바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머리맡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좋아해서 가지고 다니던 말라르메의 시집이었다. 천천히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며 시를 읽었다. 책장을 덮었다. 다시 폈다. 그리고 끝내 던져버리고 말았다. 난생처음으로 그 모든 것에 피도 눈물도 없으며 아무 냄새도 풍기지 못하고 전혀 인간적인 내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푸르뎅뎅 창백하고 진공에 담긴 것처럼 텅 빈 언어들. 잡균 하나 없이 완전히 깨끗한 증류수이지만 영양분 또한 없었다. 요컨데 생명이 없는 것이었다.

 

이미 창조적인 섬광을 일어버린 종교에서는, 신들이 인간의 고독이나 벽면을 장식하는 시의 모티브 아니면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와 비슷한 사태가 그의 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가슴에서 불타는 열망이, 대지와 씨앗을 품은 열망이 그의 시에서는 그만 하나의 티없이 정연한 지적 놀음, 기발하고 몽환적이며, 복잡한 건축물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시집을 다시 펴서 읽어보았다. 이런시들이 그동안 나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순수한 시! 인생은 단 한 방울의 피도 더럽힐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이가 되어 있었다. 인간적 요소는 야만스럽고 거칠며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육체, 그리고 불만이 지르는 비명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키고 연금술의 여러과정을 통하여 정신의 도가니 속에 넣어보리. 그것을 희박하게 만들고 증발시켜 보라.

 

그 전에는 그토록 나에게 매력적이던 것들이 오늘 아침에는 그저 단순한 지적 광대놀음이거나 세련된 사기극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문명이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언제나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ㅏ. 그렇게 인간의 고뇌는 교묘하게 짜인 속임수-순수시, 순수음악, 순수사고-속에서 막을 내리는 법이다. 모든 신앙과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자유를 얻고, 더 이상 세상에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 최후의 인간은 자신의 원료로써 정신을 생성해낸 진흙이 동났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은 제 속을 텅비운다. 뿌려야 할씨도, 배설해야 할 것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이 언어가 되고, 언어의 모임이 음악을 만들어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고독의 적정에서 그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 방정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부처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그것이 그의 비밀이다. 무서운 의미를 가진 비밀이다. 부처는 '순수한'영혼, 스스로의 무게를 비워버린 존재다. 그 속은 공허하여, 그가 곧 공(空)이다. "네 몸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나는 외쳤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풀이 자라지 않으며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